Cooper Union2019. 1. 16. 05:41

오래전의 금주 결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찬란하게 반짝이는 하얀 막걸리의 빛에 그만 취하고 말았다.


나는 달콤하고 쌉사름한 막걸리의 맛에 그만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나는 아찔한 알콜의 향과 쌀내음에 가슴이 살며시 쿵쾅거렸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영롱하면서 은은한 빛깔에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슬프게 지켜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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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per Union2018. 9. 12. 13:40


파란 하늘이 걷히고 하얀 구름이 피어났다.

하얀 구름은 너무 두꺼워서 눈처럼 하얗다.


파란 하늘은 눈부신 빛으로 빚었는데


하얀 구름에 놓쳐버렸다.




파란 하늘에 따뜻하고 때로는 더웠던 공기는


하얀 구름으로 빚으면서 서늘하다 못해 추워졌다.


동쪽에서 뜨던 해돋이는 서쪽에서 지는 해넘이가 되었고


축축하던 공기는 페가 따가울 정도로 건조해졌다.




파란 하늘은 이내 빨강색, 노랑색, 하얀색, 혹은 검은색으로 자취를 감췄다.


하얀 구름은 이내 사라졌고 따뜻한 달과 서늘한 별로 채워졌다.


하늘은 항상 나의 가슴 속 처럼 변덕스럽다.


고요한 고함에 온 하늘이 산들산들 된바람으로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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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per Union2018. 6. 2. 16:35

쥐려고 하면 할 수록 쥐어지지 않는 바닷가의 모래처럼


어쩌면 꽉 쥐려고 했던 적은 과연 있나?


두려움에 떨어 오히려 도망치고 말았다. 공포에 사로잡힌 어린아이처럼...


하얀 미소 만으로도 하얀 미소가 지어지는데... 속은 오히려 까맣게 타기만 한다.


하늘은 속절없이 비만 내리고. 까맣게 타다 남은 재 마저도 씻어내려는 것 처럼...


그대의 파랑처럼 하늘도 파랗게 쨍했으면 좋겠다


혹은 그저 파랑 파도가 하얗고 검은 모래를 말끔히 씻을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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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per Union2014. 11. 9. 18:28

나에게는 같은 종류의 극이 서로 밀어내는 성질과 같은 그 무언가가 있는것 같다. 그게 무엇때문인지 알듯하면서도 모르겠다.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가야할텐데 말이다...


일희일비 (一喜一悲)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면 일희일비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사파리의 맹수 사자가 되길 원하지만 사실은 표범일 뿐인것 같다. 용맹하다고 생각되어지지만 실제로는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심지어는 하이나에가 보여도 피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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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per Union2014. 9. 30. 06:15

어떤 사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작용으로 인해 생기는걸까?


물질의 작용만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한 것일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한다고 했을 때 과연 그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단순히 좋아하는 물건 사주고 이런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따지면 모든 부잣집 아이들은 사랑을 해야하고 모든 가난한 사람들은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지만 현실은 다들 잘 알겠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그럼 어떠한 요소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작용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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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per Union2014. 7. 2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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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근까지도 반딧불을 보는 것은 흔하지 않다. 작년 9월쯤 2달간 여행을 할 때 Amphawa 라고 방콕 근교 도시에서 본적이 있다. 이곳은 방콕 사람들에게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다. 환경이 워낙에 깨끗해서 반딧불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해가 지면 수로와 강을 따라 배를 타고 가면서 반딧불을 구경하는게 유명하다. 사실 그 때는 큰 강에서 어렴풋이 봤기 때문에 자세히 반딧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저 수 십만마리의 반딧불들이 만드는 장관을 보며 아름다음에 취한 기억이 있을 뿐이다.


그 이후 사실 반딧불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다가 최근에 지금 살고 있는 뉴욕 아파트 단지에서 흔하게 반딧불을 보게 되었다. 반딧불은 원래 환경이 깨끗한 곳에서만 자란다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뉴욕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낮에 반딧불이 실제로 생긴 모습을 가까이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은 약간 충격이었다. 물론 사진으로 반딧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적은 있었지만 막상 제대로 가까이서 보니 반딧불이 상상 이상으로 징그럽게 생겼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벌레에 대한 두려움이 많긴 하지만 저녁에 반딧불이 내는 아름다운 빛을 보면 사실 이 벌레의 이런 본 모습을 상상하긴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실 좀 징그러웠기 때문에 깨끗한 벌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정이 가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벌레의 징그러운 모습 조차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벌레가 내는 정말 아름다운 불빛이 오히려 이 벌레의 징그러운 모습 때문에 더더욱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며칠간 비가 온 적이 있었는데 비를 많이 원망했다. 비가 오는 날엔 이 벌레를 볼 수 없으니까...


반딧불의 매력은 휘황찬란한 밝은 빛이라기보단 은은하면서도 어둠과 조화가 되는 그런 빛이 아닐까 싶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도 이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겉에서 보기엔 징그러울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면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게 아닐까... 내가 한밤중에 반딧불을 보며 아름다움에 취하고 마음의 위안을 받는 것 처럼 사랑도 그런것 같다. 한순간에 불타올랐다 쉽게 꺼져버리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강렬하진 않지만 은은하게 빛을 내는 사랑... 그런게 아마도 반딧불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랑의 진리인듯 싶다.

Posted by pajamaboy
Cooper Union2014. 7. 7. 12:04

잡힐 듯 잡힐 듯... 하지만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손을 쭉 뻗어서 잡아보고 싶다.


하지만 손을 뻗어도 저 먼 편에 있는 것만 같다.


숨이 찰 때 까지 뛰어서 그 끝에 다다르고 싶지만...


여전히 저 너머에 있다...




숨이 가빠온다... 너무 힘들다...




그래도 여전히 바라본다. 저 너머를 향해!


내 마음 속의 기쁨을 알기에!


그리고 끊임없이 조용한 외침을 부르짖는다...




Posted by pajamaboy
Cooper Union2014. 6. 29. 14:55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남녀 사이의 사랑에 한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부모자식간의 사랑, 혹은 군신 사이의 사랑 등은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니 일단은 생략하도록 하자. 또한 여기에서 동성애라던지 양성애라던지 이러한 이야기 또한 논점에서 너무 멀어지는 이야기이고 그렇게까지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하려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일단은 가장 그래도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이성간의 사랑에 대해서 한정짓기로 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사랑을 하고 싶어하고 사랑을 원한다. 또 갈구한다. 물론 젊은이의 정의가 모호하긴 하지만 일단은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 남녀라고 해두자. 요즘 떠오르고 있는 단어들 중 삼포세대 (三抛世代)라는 말이 있다. 연애,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단어에 함포하고 있는 숨은 뜻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위의 3가지를 하기 희망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잘 할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비참하다는 것이다. 만약 대다수의 사람들이 위의 3가지를 별로 관심 없어한다면 딱히 삼포라는 이야기가 나올 이유가 없다. 애초에 포기할게 없기 때문이다.


위의 논리에 의한 결론은 많은 젊은이들이 능력의 여하 혹은 각자의 상황의 여하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는 사랑에 대한 갈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젊은 남녀가 사랑을 원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이러한 사랑의 감정의 원인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단순히 생리적인 현상인 것일까? 만약에 생리적인 원인이라면 그런 생리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예를 들면 정확한 과학적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힘들지만 흔히들 사랑을 하게되면 dopamine, phenylethylamine, endorphine, 그리고 oxytocin과 같은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호르몬의 분비는 어떻게 시작이 되냐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호르몬에 의한 신체 혹은 정신의 변화는 영구적일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세기를 넘나드는 사랑과 같은 이야기들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그래서 추측컨데 사랑이라는 감정은 단순히 호르몬의 분비만으로는 설명하기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만약 사랑이라는 감정이 호르몬의 분비만이 원인이라면 이론적으로는 단순히 위의 호르몬을 핏속에 주입하는 것 만으로도 사랑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단순한 호르몬 주입은 주위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이성들 중에서 오직 특정 인물에만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든다. (사실상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감정은 단순히 호르몬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의해서 이러한 호르몬들이 분비가 되고 이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의한 육체적인 변화에 영향을 준다고 결론지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 중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 다시 떠오르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러가지 생각을 했지만 딱히 정확한 근거를 알 수는 없었다. (물론 이걸 알 수 있다면 금세기 최고의 연구 결과가 아닐까 싶다.) 다만 잠시나마의 생각의 결론은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엔 특정 인물의 외모, 말, 행동, 혹은 사고 방식을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 생각에 함축된 전제조건은 결국엔 사랑이라는 감정을 유발 혹은 통제하는 물질적이지 않은, 그러니까 영적인 어떠한 실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영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근거는 단순한 물질적인 흐름만으로 사랑을 분석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사고 과정을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정말로 아름다워서 남자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졌다는 상황을 설명할 때 어떤 연유로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시각적 정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게 되어 결국 호르몬 분비에 까지 이르게 되느냐에 대해서 물질적인 설명 (예를 들면 호르몬 분비)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아름답다는 시각적 정보가 호르몬 분비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 연결고리에서 무엇인가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실체가 있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감정은 결국 개개인마다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영혼이라는 실체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혼이 개개인마다 다른 고유한 성질의 것이라면 왜 어떠한 사람이 특정한 인물만을 사랑하는지, 사람마다 다른 사랑의 양상에 대해서 설명하기 훨씬 쉬울 것이다. 약간은 비약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한 영혼이 다른 영혼에 대한 호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 비약적이라는 것의 이유는 상대방을 사랑함에 있어서는분명 물질적인 부분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외모적인 부분). 하지만 어떤 사람이 세상의 모든 예쁜 여자/멋있는 남자를 (예를 들면 정말 예쁜/멋있는 연예인들) 좋아할 수는 있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면에서 결론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영혼대 영혼의 만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결국 이러한 영혼대 영혼의 만남이 성사되려면 결국에는 상대방 영혼에 대한 원함 내지는 끌림이 있어야 하고 이는 결국에는 대화나 시간을 같이 보냄으로써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영혼은 눈에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랑하는 커플들이 깨지고 또 사귀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게 되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영혼이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것과 같이 직접적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연애의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면 결국에는 상대방의 외적인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영혼에 대해서 더 잘 알수 있을까,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 하면 나의 영혼을 상대방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가장 중요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상대방의 영혼에 대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영혼을 100% 꺼내서 만질 수는 없으므로 증명은 힘들겠지만) 어떠한 확신이 생길 때 비로서 연애 혹은 결혼이라는 결과로 발전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진정한 사랑은 사람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롱디나 아니면 인터넷 가상 연애라던지 이러한 전통적이지 않는 연애 방식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매체를 통해서든지 상대방의 영혼과 교감만 할 수 있다면 사랑은 가능할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연애나 결혼 방식인 직접 만나는 것 보다 영혼적 교감이 약간은 더 힘들 수도 있지만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다. 적어도 위의 논리가 맞다면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설명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결국 어떠한 방식을 통해서건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논점은 결국엔 영혼간의 교류라는 것이다.

Posted by pajamaboy
Cooper Union2014. 3. 17. 08:15
영혼을 불태우자...

Posted by pajamaboy
Cooper Union2014. 3. 12. 01:37

만약에 인류의 기술이 정말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게 되어 각종 장기들을 모두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인공심장, 인공 위, 인공 소장 및 대장, 인공 신장, 인공 간, 인공 관절 및 뼈, 심지어 인공 안구나 인공 뇌까지도 정말 실제 인간의 장기들과 똑같이 만들 수 있다고 해보자. (여기서 똑같다는 말은 기능적으로 같다는 말이지 재료나 크기가 같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이 가정을 바탕으로 약간은 끔찍한 가정들을 해보고 싶다. 혹시 이런 것들이 불쾌하다면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것들을 다 조합해서 하나의 인간 (혹은 더욱 정확하게는 인간 로봇)을 만든다고 했을 때 과연 그 조합은 우리가 아는 인간으로써의 작동을 할까? 만약에 작동을 한다면 과연 이 실체는 우리처럼 생각을 하고 수학 문제를 풀고 심지어 소설을 쓴다던지 시를 쓴다던지 하는 고차원적인 일도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인간 로봇)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과연 그 새로운 실체가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만약에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실제 사람과 어떻게 구분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실 그 구분이라는게 의미가 있는 일일까? 그리고 기계적으로 만든 인공 뇌라면 기본적인 프로그램은 같을 텐데 그렇다면 같은 인공 뇌에서 나온 인간 로봇들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걸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 않겠지...) 다른 상상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 같다. 만약에 노환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가 있다고 해보자. 분명 노환으로 죽은데에는 신체 어딘가에 문제가 있거나 기능적으로 너무 퇴화가 되어 죽었을 것이다. 만약이 이 사람이 심장이 약해서 죽었다고 한다면 단순히 심장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람은 다시 팔팔하게 살 수 있을까? 극단적으로 뇌는 정말 멀쩡한 사람인데 다른 신체 장기가 전체적으로 약해서 죽은 것이라고 한다면 뇌를 제외한 다른 장기를 다 교체한다고 했을 때 이 사람은 그 전과 같이 살 수 있을까?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있다면 그 전과 같이 산다라는 말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또 다른 극적인 상상을 해보자. 만약에 신체 장기는 정말 다 멀쩡한데 뇌만 다치게 되어 뇌사상태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식물인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대체로 이런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뇌만을 교체를 한다고 했을 때 이 사람은 옛날의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기능적으로 작동을 할 것이고 겉으로는 생긴 것도 같겠지만 과연 그 사람을 옛날의 사람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옛날의 사람과 같이 말하고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을까?


또 다른 생각을 해보자. 만약에 뇌는 정말 멀쩡히 있는데 다른 신체 장기들이 거의 죽기 진전의 상태에 있는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반대편에는 뇌사상태에 있지만 다른 신체 장기는 거의 멀쩡한 B라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뇌를 제외한 신체 장기들이 거의 죽기 직전의 사람의 뇌를 뇌사상태에 있지만 다른 신체 장기는 멀쩡한 사람의 뇌와 교체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 사람은 과연 A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B라고 불러야 할까?


그렇다면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이라는 실체는 존재는 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이건 뇌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신체 어딘가에? 아니면 정말 온 신체에 골고루 퍼져있는 것일까?


만약에 넘어져서 무릎에 상처가 낫다고 생각해보자. 무릎 피부에 있는 많은 수의 세포들은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세포들이 죽었다고 사람이 죽었다고 하진 않는다. 다만 좀 무지 아프겠지... (실제로 아프긴 무지 아팠다.) 그렇지만 내 무릎에 있는 세포들도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릎에 상처가 났다는 것이 나의 영혼의 일부가 상처가 났다고 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사실 이렇게 보면 죽음이라는 것의 실체도 모호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의학이란 것은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서 자연스레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의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그 학문 자체가 다루는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고 연구를 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뭔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마치 물리학자들이 뉴턴의 법칙을 이용하여 어떤 질량을 가진 물체의 움직임 등을 예측 분석은 하면서도 정작 질량이 뭔지에 대해서 정확히 정의를 못 내리는 것과 같다고 해야할까?

Posted by pajamaboy